최근 다녀 온 달무리공원은 차박족으로 인해 꽉찼더군요.그래서 좀 더 외진 곳을 소개받아 찾아 가보았습니다.

도요생태공원인데 이곳은 아무도 없는 외진 곳이었습니다.이곳을 가려면 마을 중간의 좁은 도로를 지나야하고 제방을 넘을때는 경사도와 도로폭이 좁아 무척 신경이 쓰였지만 그 외는 제 스타일에 딱 맞는 곳이었습니다.다만 건너편 낙동강 너머 철길이 있어서 간간이 기차 지나가는 소리는 들렸습니다.

 

부산에서 접근하기도 그런대로 쉬웠습니다.대동톨게이트를 지나 외곽고속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나중에 나전 터널을 지나면 바로 생림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2023-11-26

낙동강의 물안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일출 여명은 볼만했습니다.

 

이곳 낙동강 건너편 아래의 양산은 삼국시대의 명칭은 양주이고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낸 바 있어서 김해김씨 서강파가 어디를 중심으로 세거했는지 역사가 가늠이 됩니다.

▷ 답사일정(風輪) 

 

도요생태공원 - 퇴은마을 -식만마을 - 덕계마을

 

한림이라는 지명은 김해김씨 가문의 세분의 한림학사(김극검,김계희,김계금)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한림(翰林)은 정9품 예문관 검열을 한림이라고 하나 넓게는 봉교(정칠품)이하를 한림이라고 하고,좁게는 검열의 통칭입니다.  

 

 

퇴은공 김계희( 金係熙 1400~1455)는 세종때 한림(翰林)과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고 이후 은퇴생활은 한림정이라는 정자를 퇴은마을에 짓고 살았는데 광복 이후 한림정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합니다.김해 한림면은 한림정에서 유래했습니다.조선 초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회숙(晦叔). 호는 퇴은(退隱). 세종23년(신유, 1441) 식년시(式年試) 급제했습니다.

 

서강공 김계금(1405~1493)은 태종 5년에 태어나 생원시에 합격했고,단종 2년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의성현령으로 나갔습니다.김해읍지에 보면 세조2년 육신이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마을로 돌아와 그가 사는 곳을 퇴은이라 이름하고 서강(西岡)이라 편액하고, 뒷산을 오서산이라 하여 거처했다고 합니다.세상에서 육일거사라고 하는 것은 생육신에 하나를 더한다는 의미입니다.묘는 미양서원에 있습니다.퇴은을 거꾸로 하면 은퇴이니 이해가 되고 퇴은은 곧 물은이라고도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물러나 은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퇴래리라는 지명도 물러나 (이곳으로) 왔다는 의미이니 퇴은과 같은 의미로 보입니다.퇴래뜰은 화포천 유역의 뜰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공장지대가 되어 막상 가보니 마을의 느낌은 많이 반감되었습니다.

 

담헌공 김극검(金克儉 1439~1499)은 천재였다고 합니다.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렴(士廉), 호는 담헌(淡軒),  괴애(乖崖). 아버지는 김강의(金剛毅)입니다.학식이 뛰어나 일찍이 생원시와 진사시에 잇달아 합격하고, 1459년(세조 5)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한림이 되었고 특히, 시문에 능해 1469년 세조가 양성지(梁誠之) 등에게 명해 연소한 문신을 육문(六門)으로 나누어 배정할 때, 성현(成俔)·유순(柳洵) 등과 함께 시학문(詩學門)에 선발되었습니다. 이어 예문관대교에 올랐으며, 당시 발영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습니다. 그 뒤 승문원교리로서 조운사종사관(漕運使從事官)으로 활약, 경상도 연변의 군량미 10만 석을 함경도로 운송하는 공로를 세웠습니다. 세조가 죽자 예문관부교리로서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장령·예문관응교를 역임하였습니다. 그 뒤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성종 초년에는 목민관으로 나가 뛰어난 치적을 보였습니다. 이어 사표(師表)로 추천되었으며, 1477년 다시 장령을 역임하였습니다. 이 때 신주(辛柱)의 분경죄를 다스리지 못해 고신(告身)을 빼앗겼습니다. 그 뒤 1482년 사간이 되어 충청도진휼사의 종사관으로 나가 빈민 구제에 힘썼습니다. 1487년 승정원으로 옮겨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 등을 역임하고, 1491년 홍문관부제학에 올랐습니다. 그 때 언관으로서 크게 활약해 제천정(濟川亭)의 역사(役事)가 불가함을 주장하고, 여진 정벌의 부당함을 역설하며, 언론의 기능 정상화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종에게 기피되어 1개월 만에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정조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조공의 방물을 도둑맞아 다시 고신을 환수당하였습니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호조참판에 올랐고,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성종이 죽자 『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습니다. 연산군 때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가 졸하였습니다. 문장에 능했고 성품은 청렴 강직하였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이 쓴 김극검묘에 대한 한시가 있습니다.

 

金克儉墓佔畢齋金先生

 

안두령첩입추다(安頭嶺疊入秋多) 책상머리 공문서가 가을 들어 많아졌으니 

래차호남풍경하(來此湖南風景何) 이 좋은 호남의 풍경을 어찌한단 말인가

동방고인진득의(東方古人眞得意) 동방급제 친구는 참으로 마음에 들어 

일변시담경웅과(一邊是談經熊過) 서울의 시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웅장하구려

 

용진춘수곡문다(龍津春水曲文茶) 용진 봄물에 고운 비단무니도 많으려니 

이로양령흥야하(爾露楊嶺興野下) 두 늙은이 작은 배라도 타면 흥취가 어떻겠는고

미보주은구착착(微步周恩久錯錯) 임금의 은혜 보답 못하고 근신하고 있으니

시상타일당상과(柴桑他日倘相過) 후일에 혹 시상( 柴桑 )에서나 스칠 수 있을까?  

 

(필사)

이북면(二北面)은 1914년 4월1일 상북면과 하북면을 합하여 이북면이라고 했지만 1945년 8월15일 38선 기준으로 남북이 갈리면서 이북(二北)의 발음이 이북(以北)과 같아 어감이 좋지않아서 1987년 1월1일에 한림면으로 개칭되었습니다. 

 

부산 강서구 가락동에 있는 김해김씨 세거지가 식만마을입니다.

김해 김씨(金海金氏) 도총관(都摠管) 경신파(敬臣派)는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고려 때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김경신(金敬臣)을 중조(中祖)로 모시는 계파로 고려 때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 영부사(匡靖大夫僉議評理上護軍領府事)를 지낸 2세 김원현(金元鉉)을 비롯하여 4세 축은(築隱) 김방려(金方礪), 6세 서강(西岡) 김계금(金係錦), 퇴은(退隱) 김계희(金係熙), 8세 담헌(淡軒) 김극검(金克儉)을 비롯하여 김관(金寬), 김유신(金庾信) 등 명현(名賢)이 배출된 명문 세가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의 땅이 기름져 쌀의 생산량과 질이 좋아 밥맛이 좋고 밥그릇에 가득 찬다 하여 식만(食滿)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밥 만개’라고도 불렀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이곳에 오면 먹는 것만큼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으로 추정합니다.

현재의 강서구 가락동 식만리에 고려 도총관의 18세손 통정대부 김수성(金守成)이 1820년경 식만리로 와서 정착하면서 지금까지 약 200여 년간 세거지를 이루어 왔습니다. 묘소와 제실은 강서구 강동동 덕계 마을에 있는데, 김수성의 할아버지 김원현(金元絃)과 그의 아들 김순생(金荀生) 등 3대의 묘를 찾았다고 합니다.

 

김원현(金元鉉 )은 고려 전기 양주방어사를 지낸 무신으로 김원현은 『고려사』에 1044년(정종 10) 진사 을과에 합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산군수인 이만도가 찬한 비명에 의하면 문종 때 양주방어사에 임명되었을 때 왜적이 군선 190여 척을 이끌고 삼차강(三叉江)에서 양산으로 진격하자, 김원현은 전투복을 갖추고 힘써 싸워 많은 적을 참하였다고 합니다.

전승비가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망실되어 지금은 증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조선 후기에 삼조(三朝)에 양산을 빛낸 인물로 신라 때 박제상, 고려 때 김원현, 조선 때 조영규를 각각 선정하였고 이러한 내용이 『고려사』등의 자료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김원현을 평가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만도가 찬한 비명에 “빛나는 양산의 들녘이여! 물목에 건너가면 서전의 피적에 공을 걸어두었네. 양주방어사 김공은 우리나라 역사서에 외침을 막은 공으로 길이 기록되리라.”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막상 덕계마을 뒤로 덕도산(30M)에 올라 덕도초등학교 근처까지 훑어보았지만 온통 묘지들이 가득한 공동묘지 수준이라 찾지를 못했습니다.


+ Recent posts